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쿠자와 유키치 (문단 편집) === 탈아론과 제국주의 === 1885년 그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탈피하여야 한다는 '[[탈아론]](脫亞論)'을 제창하였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탈아론을 두고 그의 주변국 멸시나 [[제국주의]]적 면모는 [[갑신정변]] 이후 생겼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갑신정변 이전부터 많은 저술과 논설을 통해 조선을 비롯한 주변국을 멸시했다. 야스카와 주노스케(安川壽之輔) 교수는 저서를 통해 후쿠자와의 주변국 멸시 어록과 정복 주장을 밝히며 당시에는 인지도도 미비하고 비판받던 그가 마루야마 마사오의 작업을 통해 후대에 미화되었다고 비판하였다. 강화도 조약, 동학군 토벌, 임오군란, 갑신정변 같은 근세 한일관계사의 뒤에는 후쿠자와의 책동과 개입이 있었고, 일본의 침략과 외교정책으로 이어졌다.[[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0108140021529942|#]] 1882년 그가 창간한 지지신보(時事新報)의 사설은 그가 독점 집필하다시피했는데, 너무 노골적으로 조선과의 개전을 주장하는 사설이 [[일본 외무성|외무성]] 검열에서 문제가 되어 두 번이나 사설 없이 발행되었다. 발행정지 처분도 있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즉시 출병해) 조선 경성의 지나(중국)병을 몰살하고…해군과 육군을 대거지나에 투입시켜 북경성을 함락 시키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은 “수도뿐만 아니라 중국 400주를 유린하라”고 요구했으며, 천황의 친정준비를 촉구하는 다음 날 사설에서는 “천황의 위세로써 아군의 대공(大攻)을 기하는 것이 만전의 책”이라하였다. >“조선은 아시아 중에서도 조그만 야만국으로 그 쪽에서 조정을 찾아와 우리의 속국이 된다고 해도 기뻐할 만한 가치가 없다.”- 1875년 10월 >“조선인은 그저 완고함으로 똘똘 뭉친 사람으로 외국선만 발견하면 다짜고짜 발포하는 것은 마치 우리의 지난날과 같다.” - 1876년 11월 >“조선인은 미개한 백성이다. 극히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흉포하다.” - 1882년 4월 >“조선인은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우며 거만하다.” - 1882년 9월 6일. >“우리 일본은 동양의 선구자이자 우두머리로서 지나와 조선을 유도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무력으로 협박하는 것이 필요” - 1883년 1월. >“조선의 사절이 미국에 가면서 중국인을 동반했다는 것은 거지와 천민이 함께 가는 것과 같다.” - 1883년 8월. 또한 후쿠자와 유키치는 갑신정변 이전에도 제국주의적-팽창주의적 성향을 띈 발언들을 남겼다. >“즉 영국과 같이 왕족의 혈통을 가진 사람을 왕으로 받들고 왕명으로써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입군 체제다. 전국의 귀족이 상원에 모여서 정사를 돌보는 것은 귀족정치다. 문벌을 따지지 않고 인망을 얻은 사람을 선거하여 하원을 설치하는 것은 공화정치다. 고로 영국의 정치제도는 세 가지 정치를 혼합한 일종의 유례가 없는 제도다.” >---- > -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중. >화친 조약이나 만국 공법은 대단히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것은 오직 명목상 그런 것이며, 교제의 실제는 권위를 다투고 이익을 탐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백 권의 만국 공법은 여러 대의 대포만 못한 것이며, 여러 화친 조약은 한 상자의 탄약만 못한 것이다. 각국 교제의 도는 죽느냐 죽이느냐에 있을 뿐이다. >---- >후쿠자와 유키치, 대외의 진퇴. >후쿠자와 유키치는 국제 관계에서 만국 공법과 같은 원칙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주장하며 힘을 기를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이후 일본을 제국주의 침략 국가로 만드는 데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육지에 수십만의 용맹한 전사들을 갖추고, 바다에는 수백 척의 군함을 띄우고, 지구상에 바닷물이 통하는 곳에서는 일본 군함을 만나지 않을 곳이 없다. 일장기로 동양 전체를 뒤덮고, 그 깃발이 멀리 서양 제국에까지 휘날려 미치게 하는 그러한 광경은 또한 유쾌하지 아니한가. 나는 다름 아닌 동양 제일 강국의 백성이다. 아시아의 동쪽 변두리에 제일가는 새로운 영국을 출현시키는 일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상상하면 오늘의 사소한 고통은 호소할 정도가 못 된다.” >---- >이렇게 그(후쿠자와 유키치)는 국민을 설득하여, 아시아의 동쪽 변방에 영국과 같은 세계적인 대제국을 건설한다는 꿈을 꾸게 하면서 관민의 조화를 호소했다. 그의 ‘관민조화론’은 ‘황실론’을 바탕으로 출발한 것으로, 이렇게 특수한 ‘황실’을 보유한 일본 같은 나라에서나 나올 수 있는 논의였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언젠가 한 번은 인도, 중국의 현지인 등을 다스리는 것에서 영국인을 본받을 뿐만 아니라, 그 영국인까지도 노예처럼 압제해 그 수족을 속박시키고 동방의 권세를 우리 한 손에 움켜쥐자고 장년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 내밀히 마음속에 약속했다.” >---- > - 1882년 12월의 논고에서. >“세계 각국이 서로 대치하는 것은 금수가 서로 잡아먹으려는 기세로, 잡아먹는 자는 문명의 국민이고 먹히는 자는 미개한 나라이므로 우리 일본국은 그 잡아먹는 자의 대열에 서서 문명국민과 함께 좋은 먹잇감을 찾자.” - 1883년 10월. 출처: 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야스카와 주노스케/ 역사비평사 다만 탈아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명이 없는 익명의 논설이기에 본인이 쓴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이다신야,『歴史とテクスト 西鶴から諭吉まで』光芒社, 2001년 12월] 또한 탈아론은 1885년 발표된 이후에 별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으며, 다른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패전 이후인 1950년대 이후부터이고, 많이 알려진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라고 한다.[* 히라야마 요우 (2004). Fukuzawa Yukichi no shinjitsu (福沢諭吉の真実). Bungei Shunju. pp. 193–239.] 후쿠자와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도 멸시했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일본군 병사들에 의한 청나라 백성들의 학살 사건이 벌어지고(일본군이 점령했던 요동 반도에서 청나라 백성 6만 명이 일본군에게 학살당했고, 이것이 하필 일본인 신문 기자에게 발각되어 언론 보도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이것이 국제 사회에 보도되어 일본이 비난을 받게 되자,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이 청나라를 상대로 한 무차별 학살과 약탈을 선동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우리 일본군은 문명의 민족이어서 학살 같은 그런 야만적인 짓을 할 리가 없다. 아마 청나라 군사들이 저질러 놓고 그 책임을 일본에 덮어씌우는 조작."이라 하였다. >"조선은 본래 논할 가치가 없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당면의 적은 지나(중국)이기 때문에 우선 병사를 파견해 경성에 주둔 중인 지나 병사를 몰살하고 바다와 육지로 대거 지나에 진입해 곧바로 북경성을 함락시켜라." >"눈에 띄는 것은 노획물밖에 없다. 온 북경을 뒤져 금은보화를 긁어모으고 관민 가릴 것 없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빠뜨리지 말고 '창창 되놈'들의 옷가지라도 벗겨 가져와라."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청나라로부터 빼앗은 대만에서 대만인들이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일본의 지배에 반항하는 대만의 야만스러운 미개인들은 모조리 전멸시켜라."는 잔인한 내용을 담은 글을 몇 번이나 계속 발표하기도 했다. >"대만인은 오합지졸 좀 도둑떼" >"청국 병사는 돼지 꼬랑지 새끼" >"대만의 반민 등은 필사적으로 저항을 시도하나 대수롭지 않은 오합지졸의 좀도둑떼. 무지몽매한 오랑캐 대만인을 모조리 바깥으로 쫓아내고 일체의 권력을 일본인이 장악하고 그 전토를 모두 과감히 일본화하는 방침을 확정하고." >---- > - 1895년 8월 14일 >"대만에 있어서는 섬 전체를 소탕하고 원주민 같은 존재는 안중에도 두지 말라. 비록 무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아도 우리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무리는 하루도 그냥 놓아둘 수 없다. 조금이라도 우리 병사에 저항하는 자는 군인이고 민간인이고 가릴 것 없이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주살하고 살육하여 살아 있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한다." >---- > - 1895년 8월 14일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대만인은 닥치는 대로 주살하고, 그렇지 않아도 불순한 자들은 모두 쫓아내야 한다." >---- > - 1895년 8월 22일. >"대만인의 완고무식함은 그들의 성질로서 도저히 깨달을 수 있는 바가 아니므로 섬멸하는 것 외에는 수단이 없다. 풍속습관에 대한 법률 같은 것은 일본 국내와 똑같이 집행하고 조금이라도 못 본 척 봐주어서는 안 된다." >---- > - 1896년 1월 15일. >"대만의 미개한 야만인에게 문명의 법률을 시행하려는 것은 수레꾼이나 말구종의 무리에게 무가 집안의 예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 >---- > - 1896년 7월 29일 후쿠자와는 저서인 『학문의 권장』에서 아시아 민족의 전근대성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문명의 선도자로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 폭력적 성격을 예리하게 꿰뚫어 보았다. 또한 일본과 일본인은 거짓말을 일삼고 자기보다 강한 자에게 비굴하다며 디스를 했고, 그렇게 몇백년간 몸에 밴 근성을 뿌리 뽑으려면 국민 개개인이 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실업(實業)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 평등사상을 내세우면서, 일본인도 할 수 있는데 왜 서양인만 만나면 굽신거리기 바쁘고 말도 제대로 못하냐며 한탄하는 부분도 있다. 그러나 후쿠자와는 당대 전 세계적인 제국주의적, 사회 진화론적 가식과 그 뒤에 있는 시커먼 탐욕의 본질을 파악했음에도 이걸 도덕적 차원에서 배격하고 대체할 만한 인본주의적 주장을 펼친 게 아니라 오히려 저 탐욕을 긍정하고 내재했다. 후쿠자와는 두 번의 미국 여행과 한 번의 유럽 여행만으로 당대의 흐름이었던 제국주의의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당대를 사는 사람은 그 당대의 시간적, 공간적 인습과 편견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려우며, 그런 인습과 편견 없이 사물을 파악하는게 소수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시공간을 초월한 안목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문제의 핵심을 꿰뚫어 본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러한 국제 정세의 부조리를 비판하기는커녕 도리어 적극적으로 그 비법을 배워서 일본이 제국주의에 올라타도록 주도했다. 그리고 이런 근대화의 억압적, 차별적인 면모에 대한 긍정은 갈수록 인간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더욱더 심해졌다. 이 사람의 [[http://ko.wikiquote.org/wiki/후쿠자와_유키치|어록]]을 보면,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알 수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